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문단 편집) === [[이란 혁명]] 이후 ===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면서 정권을 장악한 [[이슬람 근본주의|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축구]]를 포함한 스포츠를 서구의 잔재로 규정하고 금지하려 했지만[* 이란의 이웃나라인 [[아프가니스탄]]도 1990년대 말 1차 [[탈레반]] 정권 시기에 축구도 가차 없이 금지와 탄압을 하여 축구장을 공개처형장으로 활용하였고, 당시 축구 선수와 감독들까지 이슬람의 가르침을 어긋낸 이교도들로 간주하여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아프가니스탄 축구 국가대표팀]]도 이때 사실상 와해 수준으로 무너졌다. 나름 [[남아시아]] 강호였던 아프간 축구는 이 때문에 탈레반 통치의 후유증으로 아시아 최약체가 되었다.] [[축구]]에 열광하던 이란 국민들이 이에 불만을 크게 터뜨리면서 새로운 정권의 입지가 흔들릴 정도로 여론이 악화하는 바람에 이는 좌절되었다. 게다가, 샤헤드 베헤슈티와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등 [[호메이니]] 정권의 핵심인사들 중에서도 [[축구]]를 좋아하거나 금지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축구 탄압은 그냥 유야무야되었다. 이런 이란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의 여파 및 [[호메이니]]의 축구 경시로 인해 [[1980년대]] 들어 전력이 차차 약해졌고, 급기야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아시아 예선에서는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득실차로 밀려서 아시아 최종예선에도 올라가지 못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호메이니 사망 이후 축구 투자의 활성화와 [[알리 다에이]]를 필두로 한 스타 플레이어들의 발굴로 암흑기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의 아시아 최강포스는 아니고 아시아 탑 레벨 수준으로의 복귀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과 일본도 축구 분야 투자가 늘고 유럽파 및 해외 진출이 늘면서 비약적으로 많이 발전했고 21세기 이후 호주가 아시아 축구에 편입되면서 이란 홀로 최강의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란 내 고위급 정치인들이나 재계의 인사들이 축구 산업과 관련된 강력한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정치적인 선전이나 이권의 수단으로 삼는 경우도 많아서 오히려 축구계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란의 축구리그인 [[페르시안 걸프 프로 리그]]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여파로 [[1990년]] 전후로 잠시 주춤거린적도 있으나 [[아시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수준이 매우 높으며, 국민들의 축구 열기도 대단하다. [[에스테그랄]]과 [[페르세폴리스 FC]]의 테헤란 더비는 [[FIFA]]에서도 주목할 정도이고, 매 경기 10만명 이상이 모여서 응원을 하는 아시아 최대의 규모의 더비이다. 원래 이란 리그는 아마추어 리그이고 프로축구가 없었다가 나중에 프로축구화되었다.[* 이 때문에 [[1990년대]]만 해도 이란의 유명 축구스타 대부분은 유럽에서 뛰었다. [[알리 다에이]]는 헤르타 베를린에서 오래 뛰었고 [[우즈베크인]] 출신 호다다드 아지지도 독일 리그에서 뛰었으며 카림 바게리, 알리 카리미, 야즈다니 등 나중에 나온 선수들도 마찬가지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로서는 북한(1966년)과 사우디아라비아(1994년)에 이어서 3번째로 월드컵 본선 승리를 챙겼는데 그 승리의 대상이 된 나라는 바로 앙숙인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이었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2:1 승리를 거두었다. 이 날 이란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적성국이라 당시 언론에서도 화제였다. 월드컵 죽음의 조에 편성되었고[* 1978년 월드컵 16강 조별리그에는 준우승팀 네덜란드와 쿠비야스가 있던 전성기의 남미 페루, 유로76 챔피언을 격파한 스코틀랜드 1998년 월드컵 32강 조별리그에는 독일과 유고슬라비아, 2006년 월드컵 32강 조별리그 포르투갈과 멕시코, 2014년 월드컵 32강 조별리그에는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 2018년 월드컵 32강 조별리그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같은 죽음의 조였다.] 2000년대 중반 세대교체의 실패로 크게 전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북한(1966), 사우디아라비아(1994), 대한민국(2002, 2010, 2022), 일본(2002, 2010, 2018, 2022), 호주(2006,[* 다만 엄밀히 말하면 이 시절 호주는 오세아니아 소속이었다. 하지만 호주가 아시아 축구에 편입된 지 오래이고 해당 기록은 엄연한 호주의 국대 커리어이다.] 2022)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달성한 2라운드 진출을 아직까지 하지 못했다. [[1994 FIFA 월드컵 미국]] 때는 최종예선 첫 경기에서 한국에 0:3으로 크게 졌고, 결국 당시 24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 이란의 최종 성적은 2승 3패였는데 최종전 사우디전에서 패하기 전까지 2승 2패였기 때문에 이때 마지막 경기 전까지 당시 준우승팀까지 24강 월드컵에 진출이 가능한 자리를 놓고 북한을 제외한 5개팀이 경합을 하는 형국이었다. 이 결과는 [[도하의 기적]] 참조. 2년 뒤, [[1996년 AFC 아시안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대표팀]]을 [[식스투 참사|6:2로 대파해서]] 국내 축구팬들에게 잊지 못할 아픔을 주었다.[* 다에이 4골, 아지지 1골, 바게리 1골. 참고로 바게리는 이 날의 골이 국가대표 첫 골이었다.] 1998년 월드컵 당시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유럽 리거를 가진 나라였다. 빅리그로는 [[분데스리가]] 정도였지만 [[알리 다에이]]는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꾸준한 활약을 했으며. 이밖에도 오스트리아나 벨기에, 터키같은 유럽 중위 리그에서 30명 이상(2부리그 포함)이 진출해 활약해서 당시 유럽 리거가 고작 [[노정윤]], [[서정원]] 뿐이던 한국이나 유럽 리거가 5명이던 일본과 비교되었다.[* 당시 스포츠계나 언론이 유럽 리거에서 이란에 너무 뒤쳐져 점점 축구 발전이 늦어진다고 허구헌날 지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